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셜록 홈즈 동생 이야기'라는 소개만 듣고 별 기대 없이 틀었는데, 첫 장면부터 스크린을 향해 직접 말을 걸어오는 에놀라의 눈빛에 순식간에 빠져들었습니다. 거기다 잠깐 등장한 튜크스베리 후작의 얼굴을 본 순간, 저는 이미 에놀라 편에서 그를 전력으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줄거리
1884년 영국, 'Enola'라는 이름처럼 홀로 서는 법을 배우며 자란 에놀라는 열여섯 번째 생일 아침, 유일한 안식처였던 어머니 유도리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알게 됩니다. 오빠인 셜록과 마이크로프트가 집으로 돌아오지만, 보수적인 마이크로프트는 에놀라를 숙녀답게 교육하겠다며 신부 학교로 보내려 하죠. 하지만 어머니가 남긴 암호를 해독한 에놀라는 직접 엄마를 찾기 위해 남장을 하고 런던행 기차에 몸을 실으며 모험을 시작합니다.
도주 중 에놀라는 우연히 가출한 젊은 후작 튜크스베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암살자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탐정 본능을 발휘해 그를 구해냅니다. 런던에 도착한 에놀라는 신부 학교의 압박과 오빠들의 추격을 피하며 어머니의 행방을 쫓는 동시에, 튜크스베리를 둘러싼 거대한 정치적 음모를 마주합니다. 사건의 중심에는 영국의 미래를 바꿀 투표권 개혁안이 걸려 있었고, 에놀라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무술과 추리력을 동원해 암살자의 배후를 밝혀냅니다. 결국 튜크스베리를 살리고 어머니와도 짧은 재회를 한 에놀라는, 누군가의 동생이나 숙녀가 아닌 '에놀라 홈즈' 그 자체로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마칩니다.
성장 서사: 엄마가 심어준 씨앗이 어떻게 꽃을 피우는가
혹시 어릴 때 "얌전히 있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기억이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그래서 에놀라 홈즈의 성장 배경이 유독 강렬하게 와닿았습니다.
에놀라의 어머니 유도리아는 당대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에게 강요되던 소위 '피니싱 스쿨(Finishing School)' 방식의 교육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피니싱 스쿨이란 19세기 영국 상류층 여성들에게 자수, 피아노, 매너 등 '결혼을 위한 기술'을 가르치던 기숙 교육 기관을 말합니다. 유도리아는 그 대신 딸에게 독서, 체스, 그리고 주짓수(Jiu-Jitsu)를 가르쳤습니다. 주짓수는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제압하는 브라질·일본 기원의 격투 무술로, 체격이 작아도 충분히 강자를 제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에놀라에게는 단순한 호신술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에놀라가 칼을 든 악당을 주짓수로 제압하는 장면은, 어릴 적 엄마가 심어준 씨앗이 마침내 꽃을 피우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특히 좋았던 건, 에놀라가 힘을 갖게 된 과정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고, 큰오빠 마이크로프트가 기숙학교 입학을 강요하고, 런던의 거리에서 각종 위기에 처하는 상황들이 모두 유도리아의 교육이 옳았음을 하나씩 증명해 나가는 구조였거든요. 에놀라가 엄마의 방에서 단서를 찾을 때 발휘하는 추리 능력도 그냥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축적된 독서와 관찰 훈련의 결과물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영화는 또 하나의 장치, '제 4의 벽 허물기(Fourth Wall Breaking)'를 씁니다. 제4의 벽이란 무대와 관객 사이의 가상의 경계를 의미하는 공연·영화 용어로, 이를 깨는 연출은 등장인물이 카메라를 직접 바라보며 관객에게 말을 거는 방식입니다. 에놀라가 위기의 순간마다 화면을 빤히 쳐다보며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그 장면들이,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연출이었습니다. 덕분에 에놀라의 성장이 단순히 스크린 속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에놀라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ENOLA'를 거꾸로 읽으면 'ALONE', 즉 혼자라는 뜻이 됩니다. 처음에는 고립된 존재로 시작하지만, 영화는 그 고립을 '주체적 독립'으로 전환시킵니다. 에놀라가 튜크스베리를 구하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고, 그것이 어머니가 가르쳐준 독립성의 진짜 의미였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당시의 시선을 꽤 정확하게 재현합니다. 실제로 영국 여성이 완전한 참정권을 얻은 것은 1928년이었으며, 1884년 당시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 속 여성들의 처지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합니다(출처: 영국 의회 공식 사이트).
튜크스베리와 페미니즘: 이 영화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닌 이유
이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에놀라는 왜 굳이 튜크스베리를 도와주려 했을까요?"
처음에는 저도 솔직히 '그냥 잘생겨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루이 파트리지가 연기한 튜크스베리 후작은 소년미와 귀족적인 분위기를 동시에 가진 외모라, 처음 기차 안 장면에서 등장했을 때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거든요. 제 경험상 이런 캐릭터는 대개 '보호받아야 하는 나약한 미소년' 역할로 소비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 구조를 꽤 영리하게 비틉니다.
튜크스베리는 외모와 달리 내면적으로 꽤 단단한 인물입니다. 그는 가문의 전통과 군 복무 강요를 거부하고, 관료가 되어 노동자 처우 개선과 토지법(Land Reform) 개혁을 이루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토지법 개혁이란 19세기 영국에서 소수 귀족이 독점하던 토지 소유 구조를 바꿔 일반 시민과 노동자들에게 권리를 돌려주자는 사회 개혁 운동을 의미합니다. 영화의 핵심 갈등이 바로 이 토지법 개혁을 둘러싼 기득권 세력의 음모에서 비롯됩니다.
기존의 기득권층은 영국 사회가 진보적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개혁 성향의 튜크스베리와 그의 아버지를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에놀라가 그를 구하는 행위는 단순한 영웅주의가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연대에 가깝습니다.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폭발물까지 준비하던 어머니 유도리아와, 노동자 권익을 위해 가문과 싸우던 튜크스베리는 사실 같은 편이었던 셈입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페미니즘 서사(Feminist Narrative)와 계급 개혁 서사를 교차시키는 구조를 취합니다. 페미니즘 서사란 여성의 자율성과 사회적 평등을 주제로 한 이야기 구조를 말하는데, 이 영화는 에놀라 개인의 성장 이야기가 곧 사회 전체의 변화 요구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이 영화가 '여성이 강하다'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외치기보다는, 에놀라의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입니다. 이게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넷플릭스가 2020년 공개한 이 작품은 공개 직후 세계적으로 큰 반응을 얻었으며, 미국영화연구소(AFI)는 2020년 주목할 만한 작품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출처: 미국영화연구소 AFI). 에놀라를 연기한 밀리 바비 브라운은 넷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로 이미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은 배우였는데, 이 작품을 통해 액션과 코미디, 감정 연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셜록 홈즈의 분량이 생각보다 적었다는 점입니다. '셜록 홈즈 스핀오프'라는 기대를 가지고 보신다면 다소 실망할 수 있습니다. 셜록 특유의 날카로운 추리 장면보다는 에놀라의 기억력과 직관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거든요.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이 영화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에놀라는 셜록의 그늘에서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만의 빛을 가진 독립적인 주인공이니까요.
에놀라가 결국 엄마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은 짧지만 강렬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건, 그 장면이 단순한 모녀의 재회가 아니라 에놀라가 드디어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에놀라 홈즈는 셜록 홈즈 세계관을 빌린 성장 영화입니다. 큰 기대 없이 켰다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가져가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추리물보다는 성장 서사가 좋으신 분, 그리고 시대를 거슬러 자기 길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에 공감하시는 분이라면 충분히 만족하실 거라고 봅니다. 넷플릭스에서 여전히 볼 수 있으니, 오늘 저녁 가볍게 한 편 어떠신가요?